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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오해로 본 조선의 노비제

  • 관리자
  • 21.12.11
  • 106

1.일반농민 같은 노비

조선은 성종때 반포된 경국대전에 수록된 '일천즉천(一賤卽賤)' 악법을 개선하지 못했다.

전에는 국민의 30% 이상으로 추정되는 노비 숫자를 고려 후기 시대상황 탓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세조 때 보법(保法)으로 군역 부담이 늘어 양인이 감소한 것이 컷다.

즉 노비제는 이전 왕조에서 넘겨받은 게 아니라, 조선정부의 정책이 만들어낸 인재 성격이 컸다.

이 악법을 깨는 시간도 적지 않게 걸렸다.

노(奴·남자)가 양인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으면 양인이 되는 법은 율곡의 제안 이후 150년이 걸렸고

1669년(현종10) 첫 입법후에도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가 1731년(영조7)에 확정되어 속대전에 실렸다.

우리가 노비제를 살피는 이유는 그 삶이 어떠했는지, 역사적 실상에 접근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비의 발생·거주·의무에 대한 자료를 검토해야 한다.

예컨대, 노비의 발생과정은 존재 양태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다.

북미를 재발견한 백인들은 원주민 인디언을 노예로 삼으려다 실패하고 아프리카 흑인을 사용?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백인보다 지리에도 밝았고 농작·수렵에도 익숙하다보니 노예가 되지 않았다.

아메리카 인디언 처럼 조선의 노비는 전쟁 포로나 약탈 노예가 아니라,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노비라고 해서 노예처럼 부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노비의 거주와 주인에 대한 의무를 보면 노예보다 일반 농민에 가깝다.

양인인 농민이 국가에 지던 군역과 비슷한 부담을 주인에게 지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노비는 서양의 물건 취급받는 노예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김득신의 반상도


2.양인같은 노비

다른 지역에 비해 변화가 더뎠을 것으로 추정되는 18세기 경상도 안동의 의성 김씨 집안 문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노비의 가족구성은 양인과 다를 바 없다. 노비매매에 의한 해체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력이 중요했던 16세기와는 달리, 18세기에는 토지의 재화 가치가 높아졌다.

차라리 소작을 주는 게 낫지, 노비를 농사에 부리며 생계를 유지해주는 일이 소유주에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니 노비가 도망을 쳐도 심각하기보다 시큰둥한 것이다. “막금이가 지난번 도망갔다가 오늘 돌아왔으니

괴이한 일이다” “덕삼이가 행랑채로 들어왔다. 덕삼이는 2일에 달아났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노(奴) 만세가 쌀 1말과 돼지 1마리를 보내 초하루 제사를 도왔다.

그 성의가 가상하지만 너무 지나치다.” 잘 사는 종 '만세' 가 제수를 보태자 감사하는 말이다.

“비(婢·여자) 분이를 석전으로 보냈다. 어머니의 명을 따른 것이지만 제사를 담당하는 비를

사사로운 일에 써 큰 실례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제사 지내는 비를 심부름 보내는 것도 불편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미국 남부의 노예-주인 관계가 연상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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