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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의 소행, 을미왜란 - 호리구치 편지

  • 관리자
  • 21.11.29
  • 126

1.일본정부 소행의 강력한 증거, 호리구치 편지

왕비 살해에 가담했던 일본외교관이 “왕비를 살해했다”고 밝힌 편지가 126년 만에 발견됐다.

이 편지는 당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명성황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이 일본 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라던, 그간의 일본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신문은 당시 주조선 일본공사관 영사관보(補) 호리구치 구마이치의 것으로 보이는

편지 8통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호리구치는 도쿄제국대 법대를 나와, 1894년 일본 최초의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외교관으로, 당시 일본인으로 이뤄진 살해 실행단의 일원이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니가타현 나카도리무라(中通村·현재 나가오카(長岡)시)에 살던

그의 고향친구 다케이시 사다마쓰(武石貞松)다. 발견된 편지는 1894년 11월 17일과

사건 뒤인 1895년 10월 18일 사이에 각각 작성된 총 8통이다. 이 중 살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 작성된 여섯 번째 편지에 현장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됐다.

호리구치는 이 편지에서 “나는 진입을 담당했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弑)했다” 고 썼으며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놀랐다” 는 소감을 했다.

오쿠고텐은 저택 뒤쪽의 침전과 여성 공간을 가리키는 일본어로

경복궁 북쪽 건청궁내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종은 건청궁의 침전인 장안당에 감금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2.편지 발견 경위와 편지의 역사적 의미

편지는 나고야 거주, 우표·인지 연구가인 일본계 미국인 스티브 하세가와(77)가 고물상에서

입수했다. 붓으로 흘려 쓴 글자는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씨가 판독했다.

일본 근대사와 한·일 관계사 전문가인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대 명예교수는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조선 침략 과정에서 일어났다”며 “당시 일본이 조선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사건으로부터 12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당사자로부터 1차 자료가 나온 것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범죄 현장에 있던 일본 외교관이 자신의 범행 사실을 인정한

편지가 발견된 것은 을미사변이 일본의 국가범죄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명성황후 살해 사건은 대원군의 뜻에 따라 일본인이 도운 것이며

실행단은 낭인 등 민간인이었다’고 주장해 왔다”고 말했다.



3.한길의 생각

호리구치 편지 발견의 의미는 영사관보의 직책을 가진 일본정부의 공무원이 명성황후 살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만큼 일본정부의 명백한 책임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의 발견인 셈이다.

한편 국가원수인 국왕과 왕비에 대한 살해사건은 가해자가 상대국 정부 라면

살인사건에 대한 법적 시효가 없다. 즉 을미왜란 이라는 역사를 잊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간 일본에게 사법적 책임을 추궁 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을미왜란 현장에 있었던 일본정부의 공무원들이 호리구치 외에 더 있었는데..

일본군 포병 소좌출신으로 을미왜란 현장을 총지휘했던 일본공사관 부무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와 명성황후를 제일 먼저 칼로 찌른 일본 육군소위

'미야모토 타케타로' 도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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